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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 블랙홀 시리즈

Robert C. Morgan

   류영신의 작품에 대해 글 쓴지 일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작품은 또 그 시간만큼 진화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화는 그녀의 작품이 실험적인 요소라는 측면에서 전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그저 예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지 않는다. 평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류영신의 변화는 반가운 일인데, 특히 숲 – 블랙홀 시리즈를 볼 때는 일말의 즐거움이 느껴질 정도다. 이 연작을 보고 있노라면 고치에서 탈피하듯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더 발전하는 화가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 시리즈에서는 그 화풍이나 작품 소재 혹은 주제에서 유사성을 느낄 수 있지만 또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물론 구석구석 같은 작품인 것 마냥 느껴지게 하는 흔적들이 있지만, 일부 의도적으로 배치한 요소를 제외하고 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조르지오모란디 (Giorgio Morandi)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언뜻 보기엔 그 작품이 그 작품인 것 같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은 작품마다 여기저기, 이곳 저곳 옮겨 다니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같아 보이지만 절대 같지 않다, 바로 이게 핵심인 것이다. 그의 정물화에서는 작품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는데, 화가는 바라보는 시점의 각도를 옮기면서 때로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형태와의 조화를 이룬다. 게다가 오묘한 흰빛이 흐르는 가운데 사용한 빛나는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색채의 사용은 실로 압권이다. 어떻게 보면 화가 류영신 역시 그녀의 최근 작품인 숲 시리즈에서 흰색과 검은색을 독특하게 엮어 쓴 게 아닌가 하고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비교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화가가 엔터테인먼트라는 허구의 세계에 이끌리는 대신, 스스로의 개성을 살린 채 내면의 소리를 따르게 되면 정말 대단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혹 작품을 통해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을 때가 있다. 경청하듯 감상하노라면 분명히 보이지만 또 어찌 보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후자의 경우는 예술작품의 탄생에 필요하다 여겨지는 요소이지만 실제 일어나기도, 예측하기도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제 자리를 찾는 것 같은 순간도 있다.화가의 작품 중에서나무를 소재로 한 최근 추상화를 봐도충분히 알 수 있다. 화가의 작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보인다. 나는 그녀의 작품마다 보이는 고요함에 감탄하게 된다. 화가의 개성이 묻어나는 나무 등걸에서 찾을 수 있는 추상적인 표현은, 특히 절제된 표현주의적 요소를 드러낼 때 가장 설득력을 지닌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표현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면 류영신은 자연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 자연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최근 작품에서는 좀 더 자연과 맞닿아 있고 싶은 노력이 느껴진다. 지난 몇 달간 그녀의 작품은 자연의 어두운 구석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녀의 화풍을 구성하는 비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 숲 – 블랙홀은 대충 훑어 보는게 아니라, 자세히 보아야 한다. 이미지 그 이상을 담고 있는 작품은 보는 이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화가가 실제 자연 속에서 나무 등걸을 매만지며 관찰하던 기억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뻗어나가는 진실을 찾아 치밀하게 표현한다. 공예를 예술로 승화시키듯 류영신은 자연을 그린다.

 

   일년 전, 류영신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진화, 즉, 나무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나무라는 요소는 흥미롭고 다가서고 싶어지는 모호함을 자아낸다. 물론 거의 모든 낭만적인 그림에서 (여기서 나는 들라크루아(Delacroix)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작가는 여러모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는 애매모호함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런 매력적인 애매모호함이 느껴지는 작품은 대개 모더니즘적 미학을 따르는 편인데, 류영신의 작품에서도 그 울림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렇게 쓰면서 그녀의 작품이 나뉘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부 작품은 한국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너무 팝 아트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자작나무를 주제로 한 더 힘 있는 작품들에서는 전통 모더니즘에 가까운 전조가 느껴진다. 이후의 그림들에서는 나무 등걸의 표면이 작품의 표면과 묘하게 융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모호한 느낌이 작품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좀 더 도발적이고 흥미로워진다고 느껴졌다. 숲 시리즈를 보면서 작품의 표면이 실제 자작나무 등걸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면서 나무 등걸 표면에서 촉감이나 질감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증거가 나무의 “나무스러움”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길 수도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선불교(禪宗)의 사상과 가깝기도 하다.

 

   류영신의 최근 작품에서 보이는 탁월한 통찰력 중 하나가 바로 화가로서의 선명한 접근법이다. 그녀의 시적인 감성이 숲의 어두운 구석에 닿아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녀가 뽕나무로 만들어진 종이를 캔버스 위에 놓고, 그 표면 위에 그녀가 몇 년 전 탐구했던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화가는 나무 등걸에서 채취한 재료로 만들어진 종이 위에 나무 등걸을 그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그려진 뽕나무 종이 표면은 화가의 나무에 대한 회상, 그리고 화가가 나무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며 그리는 나무 그림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기억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작품들이 있는데, 일단 몇 개만 추려서 언급하겠다. 그녀의 작품들은 숲 – 블랙홀로 묶어서 명명되었고 각 작품에는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32번 작품에서는 주제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두 갈래로 나뉘어지며 대칭을 이루는 긁힌 느낌의 흰색 생물 형태가 검은 공간에 기대어 나란히 존재한다. 34번 작품에서는 또 다른 느낌의 검은색이 등장하는데, 그 쓰임에 있어서는 비교적 존재감이 덜하지만 고요하고 묵직하다. 흰색의 뿌리혹, 그림의 하단 구석에 자리한 흰색의 사용이 효과적이다. 일단 이렇게 시작한 색감과 형상은 곧 추상적인 이미지로 이어지고, 나무 등걸에서 한걸음씩 치열하게 나아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표면까지 올라온다.

 

No. 30 is one of the most coherent paintings in this series, a bountiful and heroic painting, a painting filled with a hopeful qi, and a magical, yet illuminating tenacity.

 

   구구절절 말하려 하지 않을 때 작품은 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올-오버 스타일로 그린 1번 작품과 3번 작품은 단단하고 깊이 있게 공간을 유영한다. 20번 작품에서 보여지는 실험적인 요소들은 그림이란 지어지고 있는 혹은 무너지고 있는 공간 가운데 있는 것이란 사실을 신선하게 일깨워준다. 26번 작품에서는 역설적인 색감의 사용으로 있는 듯 없는 듯, 동시에 투명하고 신비한 느낌이 들게 한다. 완벽하게 절제된 모습이다. 30번 작품은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정연한 그림으로, 풍만하고 호탕하고 희망찬 “기”가 느껴지면서도 신비롭고 또 그러면서 끈기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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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C 모건(Robert C. Morgan)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미술 평론가로서 일상 생활 속에서 글쓰기, 생각하기, 그리기를 멈추지 않으며 뉴욕에서 수업도 가르치고 있다. 1997년 이래 그는 한국에 자주 방문해서 강의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에세이와 책들은 2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짤즈부르그의 유럽 예술 과학 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European Academy of Sciences and Arts in Salzburg)

©Ryu YoungSin.Western Painter From SEOUL.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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